[기획➃-2]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굿뉴스365]

2022. 11. 28. 21:39굿뉴스365

반응형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다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절을 보여

[굿뉴스365]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 상)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 하)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불의하게 존속하는 것은 의롭게 망하는 것만 못하고,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더욱이 의를 지킨다고 꼭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의하다고 꼭 존속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영흥부사로 있던 수당 이남규 선생(1855~1907)이 역적을 토벌할 것을 상소한 상소문 가운데 일부이다. 그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향리인 예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중추원의관과 궁내부특진관을 지냈지만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홍주의진에 참여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떨어지자 민종식 선생을 숨겨 주고 재기를 도모하다 일진회원의 밀고로 체포되어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서울로 압송 중에 일본의 회유에 저항하자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와 피살되었다. 수당의 일가는 수당을 비롯 아들 충구와 손자 승복 등 3대가 모두 국립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증손자인 장원도 6.25 당시 소대장으로 근무 중 전사해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등 4대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또 수당의 종형제인 춘당 이용규는 1906년 매부인 민종식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1차 의진 이후 충남 남부와 전북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해 홍주의진에 큰 힘을 보탰다.

 

민종식의 2차봉기 당시 참모로 활약하고 5월 31일 홍주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이 무너진 뒤 탈출하여 변장하고 다니다가, 7월에는 청양에서 군사를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예산지방을 중심으로 재거사를 계획하던 중 10월 2일 일진회원의 밀고로 잡혀 평리원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7년 5월에 감형되어 6월 지도(智島)에 정배되었다가 11월에 풀려났다.

 

1909년 8월 청양 추치(抽峙)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1911년 10월에 옥천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전 참의 장남기(張南基)·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 밀고로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大義士)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잡혔다. 이후 행적은 불명이다.

 

구연(龜淵) 채광묵(1850~1906)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으로 .....

 

수당 이남규선생 고택 / 사진=송경화 기자

 

 

[기획➃-2]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불의하게 사는 것은 의롭게 죽는 것만 못하다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절을 보여

www.goodnews365.net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