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④-1]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굿뉴스365]

2022. 11. 24. 21:40굿뉴스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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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홍주성을 점령하고 충남의병의 기치를 세우다

[굿뉴스365] 충절의 고장 충남은 일제의 국권 찬탈에 가장 강력히 저항했던 지역이다. 1944년말 전국 인구 통계에 대비해 도내인구수 가운데 독립운동가나 의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전체 참여인원으로도 경북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의병 활동만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의병 가운데 5번째로 많은 의병을 배출했다. 하지만 의병활동 사항에 비해 충남은 단 한곳의 기념관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지는 충남의 의병기념관 설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도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방안을 모색코자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충남 의병 발생의 요인

2. 전국 의병활동

3. 충남지역 의병활동(을미 창의)

4-1.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 상) 

4-2. 충남지역 의병활동(병오 창의 하)

5. 의병활동 기억공간 부재

6. 충남 의병기념관의 건립 필요성

 

"병오년 6월 18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병오년 홍주의진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뒤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를 떠나는 홍주9의사 가운데 한분이셨던 보령의 유병장 유준근 선생이 쓴 마도일기(馬島日記)의 한부분이다.

홍주의병과 홍주성전투 / 제공=홍성군
홍주의병과 홍주성전투 / 제공=홍성군

5월 19일 민종식의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그달 31일 성이 함락되면서 80여 명의 의병이 순국하고 145명이 생포되었는데, 그중 80여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6월 9일(음력 윤 4월 18일) 일본군사령부로 끌려갔던 의병들은 7월 말 70여 명이 석방되었지만, 홍주의진의 참모였던 남규진·문석환·신보균·신현두·안항식·유준근·이상두·이식·최상집 등 이른바 '홍주 9의사'는 대마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들 중 남규진·신현두·유준근·이식 선생 등 4명의 의사는 일제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고국산천을 떠나 적국인 대마도로 호송되는 선생의 쓰라린 심정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병오 홍주의진은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을미년(1895)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지산 김복한 선생과 복암 이설 선생이 상경하여 을사5적과 일본인 하세가와 등을 척결할 것과 의병을 모집해 일본세력을 축출할 것 등을 상소했다. 이때 청양 정선에 거주하던 전 참판 민종식도 상경해 상소를 올리고자 이설에게 상소문 초안을 부탁하고 민영익과 민영휘 등을 만나 상의했으나 상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만두라는 그들의 만류와 김복한, 이설 등이 체포되고 상소문마저 압수됐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정산으로 돌아왔다.

 

민종식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 봉기를 계획했는데 마침 홍주 을미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과 채광묵 등이 홍성·청양 일대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유림에서 최익현은 1906년 1월에 충남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단결해서 국권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홍주와 청양의 유림에서 민종식을 응원(應援)으로 최익현을 맹주(盟主)하고 거의할 것을 요청했지만 최익현은 전북 태인으로 발길을 옮겨 그곳에서 거병하게 된다.

 

최익현 선생이 떠나자 유림은 민종식 선생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부탁하고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은 의병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의병장에 오른 선생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 5만냥(2천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하고 1906년 3월15일 정산 천장리에서 거병했다.

 

민종식 선생과 홍주·청양의 지사들은 3월 17일 예산 광시 장터로 진군하고 다음날 의병들은 홍주성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홍주성 밖 하우령(지금의 홍성군 구항면과 홍성읍 우회도로의 경계지점)에 진을 쳤지만 관군의 저항으로 청양 화성 합천으로 물러나고 3월19일 새벽 공주진위대와 서울시위대 병력 200여명과 합천에서 마주해 전투에 들어갔다. 의병들은 화승총과 칼을 들고 싸웠지만 관군을 무찌르지 못하고 의병 수뇌부인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 수십 명이 체포되어 공주관찰부로 압송되고 말았다. 이때 압송된 안병찬 등은 수일 후 방면되어 다시 의병에 합류하게 된다.

 

1차 기병에 실패한 민종식은 5월 12.......

 

 

 

[기획④-1] 충절의 고장 충남에 있어야 할 의병기념관

민종식, 홍주성을 점령하고 충남의병의 기치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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